2021년 04월 13일, 화요일


국토와교통

2021년 4월호
(통권 441호)


간도를 지킨 사람들 (5) 최초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이상설


  조병현 박사     입력 2021/03/10 (수)


 
[특별기획] 청전 조병현 박사의 북한 땅 이야기

최초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이상설
 
간도를 지킨 사람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최초 임시정부 초대 정통령 이상설이다. 한국근대사에서 갑오경장 이후부터 3․1운동 직후까지 시기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해 가던 사회변동기다. 또한 힘이 없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국내외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진 시기다. 이러한 민족사적 전환기와 수난기에 수많은 한국인들은 봉건적 사회제도를 철폐하여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쳐 민족의 독립을 달성해야만 하는 버거운 책무를 안고 살았다. 이들이 남겨준 삶의 궤적은 한국 근대 독립운동과 민족 운동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과 헤이그 특사 활동은 이러한 한국 근대 개혁운동사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민족교육과 국제 사회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크로렌스 윔스(Clarance N.Weems)는 『헐버트전기(Hubert`s History of Korea)』에서 ‘당시 광무황제와 헐버트․이상설․이준․이위종은 멸망하는 국가를 위하여 모두 최선의 노력을 바쳤고 더 말할 여지도 없이 훌륭한 솜씨로 수행하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 같은 선생의 외교활동은 헤이그 사행과 함께 해외민족운동자들이 국제적으로 한국독립 문제를 제기하는 기반을 구축하였고 서구 열강들이 일제의 침략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선생은 조선의 문신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이다.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행우(行雨), 7세 때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이범세ㆍ여규형ㆍ이시영ㆍ이회영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천재로 칭송받았다.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ㆍ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수학ㆍ물리ㆍ화학ㆍ경제학ㆍ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春坊侍讀官)에 제수되고 이이를 조술(祖述 :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 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煉書監煉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ㆍ한성사범학교 교관ㆍ탁지부 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 특진관으로 승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1906년 8월경 북간도로 건너가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ㆍ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참석하였다.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1917년 3월 2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와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발해 옛터를 흐르는 수분하 강변에 유허비가 있다. 2005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1904년 6월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일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이권확대를 목적으로 1904년 5월 「대한시설강령」을 결정하였다. 「대한시설강령」에는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 장악을 명시하였다.

즉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개편하고 한국에 일본인의 이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유생들과 전직관료들의 반대상소가 빗발쳤다. 선생도 그해 6월 22일 박승봉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이 올린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상소가 있은 후에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로 보안회(保安會)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의 언론에서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게 되자 일제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선생은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 11월 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이완용ㆍ박제순 등 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조약 처리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의정부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상설은 궁성에서 풀려나온 한규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후 그는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상소를 5차례 올려 “고종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약에는 5대신 만이 서명하였을 뿐 아직 황제의 인준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이를 강력히 거부하면 무효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사순국의 결단으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주문한 <독이참찬소(讀李參贊疏)> 상소문에서 “대저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다(殉社)’는 뜻을 결정하고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 조종(祖宗)이 폐하에게 맡기신 무거운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요컨대 황제가 조약을 거절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차라리 자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자에 이 상소를 두고 옛날부터 국가위기에 신하들의 간언이 있어 왔지만 군주에게 사직을 위해 목숨을 끊어 자결할 것을 간언한 신하는 오직 이상설 뿐이라고 평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선생은 다섯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리며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마침내 12월 8일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민영환이 11월 30일 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하였을 때 종로 거리로 달려나가 모여든 군중 앞에서 통곡하며 말하였다.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지금의 이 조약은 지난날의 병혁(兵革)과는 다른 것이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이 한번 이루어짐에 나라는 망하고 인종이 이를 따라 멸종하게 될 것이다. 이제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 내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조상(弔喪)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함을 탄식하여 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분강개한 연설을 마친 선생은 울분을 못 이겨 땅에 뒹굴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시민들은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인사불성이 된 선생 곁에 모여들었고 선생이 민영환을 따라 순국하였다는 소문이 온 도성에 퍼져 흥분과 통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이상설은 을사5조약 파기투쟁 후 자택에 은거하여 거의 표면적으로는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은밀히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이희영·이동녕 또는 유완무·장유순·이시영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 방략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음력 4월 18일 양부 이용우의 친기(親忌)를 지낸 후 국권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저동(苧洞)에 있던 집을 팔아 이동녕과 같이 상해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간도 중에서도 한인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으로 들어가 그 일대에서 제일 큰 집인 천주교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재로 매입한 뒤 학교 건물로 개수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서전이란 그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이다. 

당시 정부는 1895년에 반포한 교육 입국 조서에 의거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고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 숭실학교,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장지연의 백두산정계비고 등 많은 역사 자료들이 저술되었다. 그러나 북간도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마을마다 서당을 세워 전통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신식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서숙을 설립한 것이다.

선생은 숙장(塾長)이 되었으며 이동녕과 정순만이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교원의 월급에서 교재나 학생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선생이 전부 부담하는 무상교육이었다. 서숙의 건물은 당시 건축 면적 231㎡(약 70평) 이었으며,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문을 열었다. 그곳 사람들이 신교육에 대해 이해가 없어 교직원이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입학을 권유해야만 했으며, 멀리 두만강을 건너 회령·종성·온성 등지까지 입학 권유에 나섰다. 뒤에 북간도 교육의 중심인물이 된 김약연이 제자 두 명을 보내오기도 했다. 
 
서전서숙은 처음에 학생들을 갑·을반으로 나누었다.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등반이며, 갑반에는 20세 전후의 청년학생들도 배웠다. 학생 수는 그 후에 늘어나 다음 해 학교 문을 닫을 무렵에는 7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갑·을·병반으로 나누어 갑반에는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을 비롯하여 개숙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교단에 서서 가르쳤으며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서숙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 구실을 하였다. 선생은 갑반의 산술을 맡아 『산술신서(算術新書)』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술, 여준은 한문·정치학·법학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서숙에서 보다 중점을 둔 교육내용은 신학문 과목과 함께 실시하던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이었다. 따라서 이름이 서숙이었지 실상은 독립군 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

1907년 초에 일제는 장차 민주침략의 전초기지를 세우고자 북간도의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두기로 하였다. 일제는 그곳을 조사하고 출장소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 러일전쟁 때 참전했던 일군 중좌 재등계치랑(齋藤季治郞)과 식민지 어용 국제법학자 조전치책(篠田治策)을 밀파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전서숙을 찾아갔다. 이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더운 물과 식사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선생은 문을 나서다가 이 말을 듣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이에 일본인들은 별 수 없이 개울가를 찾아 식사를 하고는 돌아가 보고서에다 ‘태도가 교만했다’고 기술하고 분통을 터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재등계치랑은 이후 1907년 8월에 일본군 기병대를 거느리고 용정에 들어가 간도파출소를 개설하고 일제의 만주침략 앞잡이로 등장하였다. 그 무렵 그는 한국통감 대리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를 통하여 자국의 외무대신 임동(林董)에게 서전서숙을 내사하여 “이상설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전 군부대신 이용익 및 상해에 있는 전 경성 주재 러시아공사 바파로프 사이를 왕복한 한 적이 있고, 금회 밀사에 참여하였다고 믿어진다. 특히 당파출소가 설치되자 곧 자금의 결핍으로 폐교하고, 그 직원 등을 각자 귀향하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간도파출소 보고와 같이 서전서숙은 그 다음해 9~10월경에 문을 닫았다. 선생이 1907년 4월 3일경 헤이그 사행으로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기 때문이다. 비밀지령을 받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훈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려 간다고 했다. 그 후 약 한 달 뒤에 이동녕만 선생의 아우 이상익과 같이 돌아왔다. 이후 서숙은 선생이 없으므로 재정난도 닥치고, 더구나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그들의 감시와 방해로 견딜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특히 간도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의 명의를 이용하여 친일교육을 실시하고자 회유공작을 편 것도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되던 <해조신문(海朝新聞)>에서는 ‘북간도서전학교와산실록(北間島瑞甸學校瓦散實錄)’이라는 기사를 실어 서전서숙이 일제의 강압으로 부득이 폐숙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해아(海牙) 만국평화회의로부터 거절되었다는 흉보가 아교(我校)에 달하자 전교의 교사·생도는 통곡하였다. 전국의 동포 누가 통분하지 않을 것이냐. 연이나 비록 비분의 열루(熱淚)만으로써 아(我) 원수를 토멸하기 난(難)하여 익일부터 재차 학업을 수(授)하였다. 
그뒤 학교는 드디어 일본군 때문에 점령되어 드디어 폐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至)하였다. 오호라! 홀연 야만의 악습을 천행(擅行)하는 일본은 한국 삼천리의 강토를 탄(呑)하고 북간도의 학교를 병탄하였다. 문명으로써 연호(然乎)아, 강성(强盛)으로써 연호아. 교육은 문명의 근본이다. 학교는 사회라고 한다. 금일 일본인은 교육의 원수이다. 학교의 도적이다.”

 
서전서숙은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끝났으나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설립목적이 일반적인 신교육기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서전서숙은 폐숙되었으나 민족주의 교육기관은 그 후 서전서숙이 자리잡고 있던 북간도에서뿐 아니라 서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또한 국내 각지에서 일제 식민지교육과 대항하면서 크게 성장해 갔다.

우선 북간도에서는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바로 인접한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이 개숙된 뒤 명동학교로 발전하면서 3·1운동 때까지 북간도 교육기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서간도에서는 1911년에 이동녕·이회영·이시영·김창환·이상룡 등이 신흥강습소를 세운 뒤 이를 신흥학교, 나아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키면서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나갔다. 그밖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민학교와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학교 등도 모두 이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을사조약이 조선 황제의 뜻에 반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고자 했다. 고종은 1907년 4월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회의에 나가 조선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조처했다.

헤이그 국제평화회의는 1899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열렸다.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국으로 여러 차례 평화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어서 회의 장소로 선정되었다. 1899년 5월 18일부터 7월 29일까지 열린 1차 회의에는 유럽 제국(터키 포함)을 비롯하여 청나라․일본․멕시코․페르시아․미국 등 26개국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협약’,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 ‘1864년 8월 22일 제네바조약의 원칙을 해전에 응용한 조약’의 3조약과 ‘폭발물 투하 금지선언’, ‘독가스 사용금지 선언’, ‘덤덤탄(명중하면 퍼지는 탄환) 사용금지 선언’의 3가지의 선언을 채택했다.

제2차 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 제국을 추가한 44개국이 참가했다. 2차 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전시 법규의 제정’에 중점을 두고 제1차 회의 때의 3조약 수정 및 10개의 전쟁법규조약을 추가로 채택했다.

이처럼 헤이그 평화회의는 국제적인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전쟁법규에 관하여 다수의 조약을 채택하고,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협약’은 주선과 거중조정 외에 새롭게 국제심사위원회와 상설중재재판소의 제도를 설치하였다. 이 제도는 실제 분쟁해결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에서 분쟁해결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고종은 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자주권을 침해받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선생을 만났고, 시베리아 철도로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함께 주한 러시아공사를 지냈던 웨베르(Wäber, K. I.)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흘 전인 6월 15일부터 평화회의가 개최되어 회의가 진행 중에 있었다.

특사 일행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연달아 방문해 “을사조약은 한국 황제가 비준하지 않았으니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탈취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사절을 특파한 것”이라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였지만 넬리도프는 형식상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그 책임을 미루었고,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다.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와 열국의 방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특사 파견을 도왔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일제는 현지 공관과 회의대표에게 한국대표의 회의참석을 제지하도록 지시하였다. 하는 수 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控告詞)’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그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은 회의장 문 앞에서 외국기자들에게 제국주의 세력의 기만성을 지적하였다.
 
“당신들이 말하는 권리의 신은 유령이요, 당신들이 정의를 존중하는 것은 겉치레요, 당신들의 기독교 정신은 위선이다. 한국은 왜 희생이 되어야 하는가? 약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왜 모든 의무와 조약을 짓밟아버릴 수 있는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정의를 말하고, 권리를 말하고, 법률을 말하는가? 왜 솔직히 대포가 유일한 법이요, 강자는 처벌될 수 없다고 실토하지 않는가.”
 
또한 러시아의 유명한 신문기자 오이리 및 투마스 등을 방문하여 그들의 동정을 얻었고, 7월 5일에 선생이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48년에 자주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던 중 특사들은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Stead, W. T.)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이위종은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대한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하여 참석자들 공감을 샀다. 이들은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각 언론을 통해 보도하였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 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당해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본국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순종 1권 8월 8일(양력) 5번째 기사에 의하면 그해 8월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재판(闕席裁判)으로 이상설·이위종·이준 등이 거짓되이 밀사라고 칭한 죄에 대하여 교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법부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 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질품서(質稟書)를 받고 그 내용을 보니 ‘피고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의 안건을 검사의 공소에 의하여 심리하였습니다. 본년 7월 20일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의 무리는 얼마나 나쁜 성품을 타고났으며 어떤 음모를 품었기에 해외에 몰래 나가서 밀사라고 거짓말을 하고 제멋대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나라의 외교를 거의 망치게 하였다. 그들의 소행을 따져보면 중형에 처해야 하겠으니 법부(法部)로 하여금 법조문대로 엄하게 처결하라”는 조칙을 정중히 받았습니다.

이상설 등을 기간을 정해 염탐하여 붙잡아서 법조문에 비추어 엄하게 처리해야겠으나 피고들이 어느 지방에 머물러 있는지 종적이 묘연하여 염탐해서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건은 판부(判付)에 관련되어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므로 피고들을 체포한 다음 피고 이상설은 《형법대전(刑法大全)》제352조의 사신(使臣) 명령을 받은 관리라고 사칭한 자를 다스리는 법조문을 적용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피고 이위종, 피고 이준은 같은 조목, 같은 법조문에 해당되나 《형법대전》 제135조의 추종한 범인은 주범의 법조문에서 한 등급을 낮춘다는 조문을 적용하여 종신징역에 처한다는 선고서를 작성하여 문의합니다 하였으니, 해당 범인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평리원에서 제기한 법조문에 의하여 처결하되 체포한 다음에 형을 집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상설은 사형선고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명객으로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과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최정익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ㆍ김학만ㆍ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ㆍ이범윤ㆍ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그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권황제아령파천소(勸皇帝俄嶺播遷疏)’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 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종 황제의 아령파천은 선생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 유인석’ 두 사람 명의로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의 조인이 확실시되던 1910년 7월 28일경 작성되어 고종에게 품신(稟申)되었다. 상소문은 고종이 러시아 땅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파천(播遷)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것이 주 내용이었으나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이후 일제가 고종을 더욱 철저히 감시했기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 이 내용은 필자의 장편소설 『간도묵시록』에도 잘 나와 있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으나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 왔다. 1911년 김학만ㆍ이종호ㆍ정재관ㆍ최재형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 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권업신문 주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담당하였다. 1913년 이동휘ㆍ김립(金立)ㆍ이종호ㆍ장기영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나 우리리스크에 있던 애국지사들은 상해와 달리 매우 뜻깊은 항일애국활동을 전개했다. 안중근 의거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거대한 항일전쟁 신화들은 거의 모두 선생을 정점(頂點)으로 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인맥이 주도하였다. 선생은 러시아 신한촌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
 
1914년 이동휘ㆍ이동녕ㆍ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해외망명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초대 의장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정통령은 임금님 밑의 차상위 최고지도자라는 뜻이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정에 통합되었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ㆍ신규식ㆍ조성환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본부장을 맡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양력으로 1917년 3월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위대한 애국자이신 선생은 헤이그 비밀 특사 의거가 실패로 끝난 뒤에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귀국할 수 없어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항일전쟁을 지휘했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웠다.

조국 광복을 못한 죄인으로 부끄럽다며 묘지도 남기지 않았다. 나라와 나랏님을 잃은 불충의 인물이 무엇을 남긴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있다면 그것조차 불충이라고 생각한 최고의 충신이다. 매국노 역적질을 하고도 무덤 치장이 요란한 자가 적지 않은 나라에서 최고 충신 독립운동가 다운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가 그때와 비슷해 선생을 더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사순국의 결단과 민족교육, 항일애국 활동, 대한광복군 정부 정통령의 참된 업적을 알고 있는 국민이 많지 않다. 선생의 보배로운 피는 봄에 이슬이요, 여름에 비이니라. 선생의 빛난 정성은 밤에 별이고, 낮에 태양이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선생의 영정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간도 수복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진천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숭모사업’을 잘 마무리하고 이상설 정통령의 참된 평가와 함께 후손의 번창을 간절히 빌어본다. 아직까지 예전 발해 옛터를 흐르는 ‘슬픈 강’의 뜻을 지닌 ‘수분하’ 강변에 세워진 유허비를 찾아 예를 갖추지 못했다. 수분하 강변에 서서 선생의 유허비를 참배하지 않고는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날까지 편히 쉬소서….
 
조병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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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본주택’ 컨퍼런스 개최…홍보관도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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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 해외 비교시 처벌수위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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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흥에 여의도 4.3배 신도시 건설

‘2.4대책’에서 밝힌 수도권 18만호 공급계획의 39% 나머지 11만호 4월 공개…부산·광주엔 중규모 공급   정부가 수도권 집값 안정을 위해 18만호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 신규 공공택지를 확보하기로 한 가운데 그 중 약 40%에 해당하는 7만호의 주택을 지을 신도시..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2·4대책’ 실효성 의문…“충분히 가능하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 국토교통위 업무보고서 밝혀 현금청산 논란엔 “가격안정 위한 불가피한 조치”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2·4 공급대책에서 제시된 신규 주택 공급방안은 기존 개발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토지주에 돌아가는 이익도 크기에 충분히 실효성이 있다..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2·4대책] 공공주도 개발로 전국 83만호 공급

서울에 32만호 공급…추격매수엔 입주권 안줘 공공기관이 직접 시행하는 재건축·재개발 신설   정부가 서울 등 대도시의 주택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공공이 직접 시행하는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또한 역세권·준공업지역·저층주거지에 대해선 정부..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2021 국토교통부 업무계획] 도심 주택공급 확대에 역량 집중

포용적 주거안정 실현 도심융합특구·캠퍼스 혁신파크 등 새로운 거점 조성   정부가 올해 서울 등 대도시 주택공급 확대 정책을 통해 포용적 주거안정을 실현하면서 지방과 수도권이 상생하는 국가 균형발전에도 박차를 가한다. 코로나19 위기를 회복하고 선도형..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국내 최대 서울역 쪽방촌, 주거단지로 재탄생

공공주택사업으로 정비…총 2410호 주택 공급 예정 도시재생 통해 쪽방주민 지원시설․생활SOC도 설치   국내 최대 쪽방밀집 지역인 서울역 쪽방촌이 새로운 주거단지로 다시 탄생된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용산구는 지난 2월 5일 ‘서울역 쪽방촌 주거환경..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공제조합 운영방식 전면개편…58년만의 대대적 혁신

조합 경영 과감한 쇄신…그 성과 조합원에 귀속 공제조합의 투명하고 공정한 의사결정체계 구축   건설관련 3개 공제조합의 운영방식이 58년 만에 전면 개편된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월 9일 건설산업혁신위원회(국토부 제1차관, 이복남 서울대 교수 공동위원장)를 개최..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서울시, GTX 3개역 환승거점 추가 신설 요청

정거장 추가 신설 시 출퇴근 시간 단축 기대 GTX-도시철도 ‘공공교통 시스템’ 완성 주력   서울시가 수도권과 주요거점 간 빠른 접근과 대중교통 이용 편익 향상을 위해 국토교통부에 도시철도 주요 환승 거점 구축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의 정거장 추가 신설을 건의..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합법적 외국인근로자 규모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외국인력 현황 파악과 정책적 대응방안불법체류자, 불법취업 근절 위한 현실적 대안  “합법적인 외국인근로자 규모 단계적 확대해야” 인구구조 변화에 의한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노동력 부족을 야기하고 있어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대응방안 모색이 시급한 상황이다... 박광배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스마트중량센서 및 무인무정차 축중기 활용 실시간 물류정보 시스템

자재 입출고 및 운송까지 전주기적 운송·물류 관제 모니터링 시스템 구현 실시간으로 화물차량의 중량정보와 물류 입출고 정보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물류신기술이 나왔다.이 기술은 화물차량에 스마트중량센서와 카메라, GPS를 설치하여 중량정보, 영상정보, 위치정보를 조.. 김정현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새만금 ‘글로벌 신산업 중심지’로 개발

2030년까지 도로·공항·항만 등 기반시설 완비 2050년 인구 27만 도시로…2단계 기본계획 확정   새만금이 앞으로 10년 안에 도로·공항·항만 등 기반시설을 완비하고 글로벌 신산업 중심지로 도약할 토대를 갖춘다. 또한 2050년까지는 100% 개발을 마치고 정주 인구 .. 이미영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드론 전용 규제특구 33곳 지정

사전 비행승인 등 규제 면제·완화해 실증기간 단축   인천 옹진군, 대전 서구, 세종, 광주 북구 등 전국 15개 지자체 33개 구역이 ‘드론 특별자유화구역’으로 지정된다. 이 구역에서는 드론 실증을 위한 각종 규제가 대폭 완화된다. 국토교통부는 2월 10일 드론 전용 .. 이미영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나로우주센터 가는 길 빨라진다…국도 15호선 전 구간 개통

나로우주센터 가는 길 빨라진다…국도 15호선 전 구간 개통 국도 15호선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3.2㎞ 2차로 구간이 2월 8일 개통됐다. 이번 개통으로 2020년 12월부터 운영하고 있는 포두면 옥강리 3.7㎞ 구간과 연계한 고흥-봉래 도로건설공사 6.9㎞ 전 구간이 완전 개통됐다.이번.. 김정현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기술사법의 자격 공인 특성, 조성법을 규제법으로 전환

「기술사법」 개정 방향 ⑧ 「기술사법」의 자격 공인 특성, 조성법을 규제법으로 전환 필자가 지난 2월호 「기술사법」 개정 방향 원고를 마감한 후, 1964년 10월 23일 시행된 제1회 기술사 시험에 대해 김상근(1965)이 기고한 ‘.. 박효성 건설기술교육원 겸임교수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간도를 지킨 사람들 (5) 최초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이상설

 [특별기획] 청전 조병현 박사의 북한 땅 이야기최초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이상설  간도를 지킨 사람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최초 임시정부 초대 정통령 이상설이다. 한국근대사에서 갑오경장 이후부터 3․1운동 직후까지 시기는 전.. 조병현 박사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토지주택공사에 땅을 판 후 10년간 책임져야

토지주택공사에 땅을 판 후 10년간 책임져야(대법원 2020. 5. 28. 선고 2017다265389 손해배상) [당사자]▶원고/상고인 : 한국토지주택공사▶피고/피상고인 : 제주도 주민 2인▶파기, 원고/상고인 승소▶판례공보 2020.7.15자 1248쪽. 사건의 내용 한국토지공사는 .. 김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우유가 과연 ‘완전식품’일까? ②

우유는 1년 동안 송아지 성장시키기 위한 것 우유에 들어있는 많은 양의 단백질과 지방, 당분(락토오스), 10여 가지의 호르몬 물질은 송아지의 빠른 성장을 도와준다. 막 태어난 송아지(20~60kg)가 처음 한 달간 하루 400g씩 늘어나다가 3개월째부터는 하루 1kg씩 늘어난다. .. 류영창 박사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혈액순환에 좋은 식품, 둥굴레와 당귀

둥굴레, 사포닌 풍부 면역력 높여줘당귀, 적혈구 생성 도와 항암효과 기대 농촌진흥청은 코로나19로 건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여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면역기능 개선에 좋은 것으로 인정받은 식품 원료 24종을 발표했다. 우리 몸에 유해한 물질이나 비.. 김정현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소소하지만 확실한 ‘순창’의 힐링포인트 3

순창은 장류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섬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적성강이 고추장, 된장 등의 재료가 되는 맑은 물과 풍성한 곡식을 뒷받침한 덕분이다. 순창이 ‘힐링 1번지’로 불리는 이유도 천혜의 자연에 있다. 풍경은 눈길 닿는 곳마다 아늑하고, 정직하게 거둔 음식은 건강을 선.. 한국관광공사 | 국토와교통 2021년 03월호(440호)
文 “예상보다 훨씬 뛰어넘는 주택 공급할 것”

공공재개발 등 ‘특단의 공급대책’공급 부족에 대한 국민 불안 일거 해소 목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 공공재개발, 역세권 개발, 신규택지 개발 등 부동산 공급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설 연휴 이전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2월호(439호)
공공재개발·재건축으로 ‘부담가능주택’ 공급 확대

대한건축학회, 건축도시 공공뉴딜사업 발전방향 심포지엄 개최  건축도시 공공뉴딜사업 발전방향 심포지엄이 1월 14일 대한건축학회 유튜브 채널 ‘건축TV’를 통해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2021년을 맞아 대한건축학회에서 3회에 걸쳐 시리즈로 기획된 심포지엄이.. 김정현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2월호(439호)
도심 주택공급 활력소, 공공재개발 8곳 선정

정체된 정비구역 ‘흑석2’ 등 공공재개발 후보지로 약 4700호 공급 기대․․․해제·신규구역도 3월말 선정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지난해 5월 ‘수도권 주택공급방안’에 따라 도입한 공공재개발사업의 첫 시범사업 후보지 8곳을 선정했다. 이번 후보지..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2월호(439호)
사전청약 3만가구 차질없이 준비…구체 계획 4월 발표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추가 주택공급 방안 나온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월 15일 “노후도 등 정비 시급성, 주택공급 효과 등 공공성, 실현 가능성 등을 고려해 8개 구역을 공공재개발 시범사업 후보지로 선정했다”며 “예정대로.. 박병기 기자 | 국토와교통 2021년 02월호(4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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