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20일, 일요일


경주 종합개발사업 ④ 보문관광단지 계획구상과 김대사의 호통
박병주 / 중앙도시계획위원․홍익대 명예교수 / 

보문관광단지 계획구상과 김대사의 호통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단이 발족되어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창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초창기에 나는 경주 도시계획을 1년 전부터 맡아오고 있었던 탓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시계획에 관한 뒷받침을 해 주다가, 1973년 이와는 별도로 구성된 보문관광단지의 계획 구상 및 기본계획 작성을 위한 교수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규수 팀에는 강병기․김수근․나상기․이광로, 본인 등 5인과 나중에 경제분야를 전공하는 김승훈․이형순 두 교수가 가세하였다.
이 작업은 IBRD차관을 받기 위해 경주관광종합개발사업 중 보문관광단지 개발사업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다른 도시개발 사업은 사업내용과 이에 따른 사업비가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었지만, 보문관광단지의 경우는 단지내에 들어서는 시설에 따라 사업비의 액면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먼저 대체적인 계획구상을 통해 타당한 사업규모를 설정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보문관광단지 개발의 촉진은 당시 개설된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간의 연락선 페리호 항로운항과 깊은 관계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연락선 운항사업을 맡은 재일교포 정씨는 경주에 관광기지를 만들어 일본의 관광객을 페리호로 실어온 후, 경부고속도로를 활용하여 관광 위락사업을 펼쳐 보았으면 하는 구상까지 한 것으로 안다. 정씨의 경주관광개발 구상안은 검토결과 타당성이 없어 곧 폐기된 바 있다.
아무튼 보문관광단지 교수팀은 처음에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모였는데 곧이어 청와대에 가까운 별도의 장소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마침 여름방학 때여서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토론과 작업이 계속 되었다. 보문관광단지와 주변 여건의 분석, 환경보존과 개발 가능지의 구별, 이 단지 안에 설치해야 할 시설 및 종류별 규모, 유치 관광객과 시설이용 인원의 측정, 시설 투자비와 사업성 등을 개략적으로 짚어 나가는 일을 되풀이하여 연구 검토해야 했다.
그러던 1973년 8월 하순의 어느날, 정소영 장관(당시는 경제수석을 장관이라고 하였다)과의 합동회의에서의 일이다.
내가 “대만, 홍콩, 일본 등 가까운 나라의 관광휴양시설을 둘러본다면 우리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정장관은 즉시 그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이어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갔다.
“개학이 박두하니 1주일이라도 다녀오려면 바로 내일 오후에는 떠나야 하는데 선생님들 가능합니까?”
하고 우리 자문 교수단에게 반문하였다.
여권 준비만 된다면야 다음날 출국에 지장이 없겠지만, 여권 내는데 보통 2주일은 소요되던 시설이었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정작 정장관은
“여권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 외에 내일 떠나는데 지장있는 분 있습니까?”
모두 여권만 해결되면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하였다.
“전원 내일 출국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결정합시다. 지금 곧 나가셔서 사진 2매를 준비하시고, 내일 아침 외무부 여권국장에게 가십시오. 여러분은 현직 교수니까 신원조회는 오늘밤 중으로 완료되도록 수배하겠으니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 이튿날 우리 일행 5인은 계획대로 대만 대북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청와대의 힘이 과연 대단하구나’, ‘장관은 멋을 알고 있어’ 등등 한 마디씩 하였고 좋은 여행 성과를 얻어 돌아오자고 했다.
대북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들은 주중 대사관에서 마중나온 사람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맸다. 찾다못해 우리 일행은 직접 택시를 타고 대사관으로 갔다.
당시 주중대사였던 김계원 대사와 인사를 마치자 김대사는 “오늘 어디서 숙박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대사관에서 호텔 예약을 해 놓은 것으로 압니다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설이 좋은 베이토오의 특급호텔에 묵고 싶습니다.”
그 순간 김대사는 몹시 불쾌하다는 듯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흥분된 표정으로 다짜고짜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바로 그때 대사관 직원이 전문(電文)을 들고 들어왔다. 이를 본 김대사는
“아, 그랬군요.”
하는 외마디와 함께 그의 경직된 태도도 달라졌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더니
“죄송합니다. 이제야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묘한 임무를 띠고 오셨군요. 그런 줄 몰랐습니다. 실은 선생님들이 베이토오를 들먹인데 대해 잠시 흥분했습니다. 베이토오에 대해 선생님들은 잘 아십니까?”
“그저 위락시설이 잘 갖추어진 온천장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나도 그곳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대사관 임무중 하나가 한국의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그곳에 가는지 체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들께서 그곳에 가시겠다고 하시니,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우리도 한바탕 같이 웃었다.
이렇게 하여 김대사의 명에 따라 대사관 직원이 안내해 준 베이토오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김대사가 그토록 경계한 곳이어서 우리 일행은 더욱 그곳의 유흥시설에 흥미를 느꼈다. 그 당시 베이토오의 유흥경기는 대단했었다. 우리는 이곳저곳의 유흥시설을 보고 싶었고 또 그 내용을 경험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시작된 여행은 대만의 일월담(Sun Moon Lake), 홍콩, 일본의 아다미와 나가시마 온천장 시설 등을 답사하는 것으로 하였다.
돌아올 때 정장관과 윤근환 비서관에게 조그만 선물이나마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또 그때를 전후하여 수차례의 외국여행을 했지만 나는 그때의 여행경위를 가장 깊은 추억으로 상기하곤 한다.

이원만 회장 생각과 불국사 주변 정비

경주 불국사 방문횟수가 많은 사람을 꼽는다면 아마 나도 그 안에 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그만큼 나는 경주 불국사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금년 봄에도 내가 신세를 많이진 K씨의 따님 결혼식 참석차 경주에 들른 길에도 허겁지겁 불국사 경내를 둘러본 적이 있다. 또 그때 불국사 방문길에 차창을 통하여 보이는 코오롱호텔을 보면서 지난일이 생각나 한동안 감회에 적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작고한 불국사 코오롱호텔 건립자 이원만 회장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73년 어느날의 일이었다. 청와대 정소영 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곧 정장관을 만났다. 용건은 불국사 부근에 현대식 호텔을 건축하는 방침이 세워져 그 입지 검토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흔쾌히 응했고 곧이어 현지답사를 마치고 정장관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보고 자리에서 정장관은 호텔 입지선정은 박교수의 판단을 존종하겠다는 점과 박대통령의 불국사 호텔 신축계획에 따르는 여태까지의 말씀도 들려주셨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정장관은 나에게 불국사 호텔계획을 계속 도와달라는 얘기가 있었고, 나는 이회장의 요청에 따라 호텔 건설의 고문직을 맡았다.
나는 이원만 회장과 동행한 경주여행 동안 이회장이 일본에서 고생한 얘기, 그 뒤 성공한 얘기, 재일교포 경제인단의 일원으로 박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얘기, 불국사 호텔을 짓도록 허락해 주신 경위 등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도 일본에서 공부한 탓으로 이회장의 일본에서의 생활 얘기에 공감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이 분의 말에는 가식이 없고, 솔직하면서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또 인간적으로 존경의 생각을 가지게도 되었다. 그러나 불국사 호텔의 입지선정에서는 나와 이회장의 견해 차이가 컸다. 이회장은 불국사 사찰 경계에 바로 붙은 자리를 원했고, 나는 불국사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차는 현지에서 시작되었고, 내 뜻을 이회장에게 설득시키는데 큰 고역을 치러야 했다. 결국은 청와대도 개입되어 이회장이 당초 생각했던 자리보다 떨어진 곳으로 입지를 선정하게 되었다. 호텔 입지결정을 하고 부지매수와 호텔 건축의 초기단계에 나는 이 호텔건설 고문직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회장이 몹시 서운해 했다.
이회장은 인정많고 위트 있는 사업가로 유명하였다.
이회장이 호텔건설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 데에는 숨은 일화가 있다.
박대통령이 불국사 철도호텔에서 묵는다는 정보를 들은 이회장은 해가 뜨기 전 불국사에 도착하여 박대통령의 아침 산책을 기다리고 있었고, 불국사 경내에서 자연스럽게 대면하였다.
박대통령을 만나자 그는 인사를 했다. 틈을 보다가 “각하, 이곳 불국사에도 제대로 된 호텔이 하나쯤 있어야 할 텐데요. 각하께서 좋다고 하시면 제가 세계수준의 호텔을 이곳에 건설해 봤으면 합니다.”라고 제의하자,
“호텔 건축은 돈이 많이 들 텐데 가능합니까?”
“예, 자신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해보세요.”
라는 서전허락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원만 코오롱 회장이 오늘날 불국사 코오롱 호텔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밖에도 1960년대 근대화 산업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박대통령을 움직이게 한 몇 가지의 결단에 이회장 특유의 위트 있는 아이디어가 작용하였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수출산업공단의 탄생을 들 수 있다. 지금도 ‘코오롱’하면 먼저 이원만 회장 생각이 진하게 떠오르는 때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회고하건대, 옛날의 불국사 주변은 어수선했었다. 불국사 철도호텔이란 이름의 일본식 여관이 있었는데, 시설이 보잘것 없었다. 그리고 이 호텔에 인접하여 불국사 사찰 진입로를 따라 소규모의 여관들과 식당, 매점들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었다.
이와 같이 불국사 주변에 여관시설이 많았던 까닭은 수학 여행단이나 일반 관광객들이 불국사를 구경하고 석굴암에 올라 동해의 해맞이를 하려면 불국사 주변의 여관에 투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불국사 석굴암의 관광객이 증가되어 불국사 주변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따라서 1970년도 도시계획 재정비 작업 때 이 지구에 대한 조사를 더욱 철저히 했고, 도시계획에서 불국사 경내와 일정 거리를 두고 따로 상업지역을 설정하여 기존의 불국사 주변 상업주거시설을 이전하도록 계획하기도 했다.
1971년 7월에 시작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서에서는 이 지구의 정비계획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주시에서 불국사 지구의 신택지 조성 설계도면, 토지조성 도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나는 이 도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 토지조성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부자르듯 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역사 관광지다운 멋이 있는 택지조성과 건축 배치 구상, 공공공간의 시설 배치도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정래형 경주시 도시과장은 난처하다는 듯
“이 계획은 벌써 각하의 결재까지 얻었으니, 이 이상의 대지 조성설계 얘기는 말자.”는 것이었다.
정과장의 호소에 더 이상 거론은 그만 두었으나, 나는 이 일을 두고 그 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고위층에게 좀더 강하게 계획 수정을 건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불국사 앞 주차장과 상업, 주거단지 조성사업은 준공되었고 분양계획 단계에 들어섰다.
대지분양계획에는 시장성 파악을 통한 업종별 규모정책이 필요했고, 불국사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업종에 따라 계열화시키는 계획이 수반되어야 했다. 윤근환 비서관은 이의 중요성을 느껴 꼼꼼하게 직접 챙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단지 조성의 세부 가로망에 허점이 드러났지만, 도리가 없어 이미 조성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단계에서 주차장에 접한 상단부의 대지는 경주시 직영의 건물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이 건축물의 용도와 건축계획 구상을 내가 맡게 되었다. 나의 구상은 이곳에 경주관광 특산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경주시내 경주 공예품협동조합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작품을 관광객에게 홍보할 수 있는 전시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전시관 중앙에 큰 홀을 두어 행사도 할 수 있게 하고, 넓은 건축 공간을 중심으로 회랑식으로 건물을 연결시켜 계열별 전문점포를 배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관광객은 각각 매력있는 상품을 보기 위해 한바퀴 돌면서 외부의 녹지공간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시장도, 청와대 당국도 이 구상을 수용해 주었고 나의 책임 아래 건축설계도 진행되었다.

건축공사와 외부공간의 조경공사도 준공되었다. 그런데 그 후 경주시가 전시관 계획을 백지화하고 넓은 내부공간도 시골 백화점식으로 좁게 분할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해 나갔다. 계열별 전문상품 취급을 위한 회랑의 건물도 상품의 성격과 관계없이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임대계약을 맺어나갔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초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주시장의 이런 근시안적 처사에 충격적인 유감을 갖게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경주시의 재정난 탓이었다. 이런 처사에 몹시 불쾌하여 한동안 불국사에 가더라도 이 상업단지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앞으로 머지않은 시기에 내가 바라던 모습으로 회복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명예시민의 바람과 화형식 봉변

1976년 어느날, 철도를 이용해서 경주역에 내린 나는 역전에서 바로 보이는 지점에 높은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공사 안내간판을 보니 앞으로 몇 층은 더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경주에 이런 높은 건물이 우뚝 올라가면 경주의 스카이 아린이 크게 손상되어 큰일이 벌어질텐데.’
걱정을 하며 경주시장을 찾아갔다.
“시장님, 그 건물이 계획대로 올라가면 각하께서 야단이 나실 텐데요.”
했더니, 경주시장은 안색이 변하며
“무슨 얘깁니까? 차근차근 얘기해 보십시오.”
라고 했다.

나는 얼마 전 청와대에서 경주 도식경관과 건축의 높이에 대해 이야기가 있었던 분위기를 전했다.
시장은 즉각 문제가 된 그 건물의 공사를 당시 진행중인 건축 높이로 동결하여 이를 마무리하도록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 건물의 끝마무리 높이인 25m를 경주시 건물최고 높이로 하는 경주시 건축물 높이 규제조치의 제도화 방안이 이를 계기로 진행되었다.
당시 경주 실정으로 보아 상업업무용 건물이 8층 이상으로 건축될 정도의 수요도 없었고, 도심부의 지주들도 건축고도 제한에 대해 이를 수용하는 여론이어서 별다른 진통없이 최고 높이를 25m로 하여 지구에 따라 타당한 높이 제한의 방안이 추진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문화재 보호지구 주변의 건축 높이를 7m로 제한하는 이른바 한옥보존지구의 책정에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한옥보존지구로 묶여진 대상지는 원칙적으로 예산의 범위 안에서 선매제도나 건축 외관의 보수에 따른 보조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었다. 구체적으로 지구 단위로 단계적 전면매수가 논의된 바 있었으나, 경주개발재정집행의 계획에서 우선순위가 자꾸만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주의 한옥보존지구 내에는 단층건물로 지붕은 검은색 한식 골기와를 얹어야 하고, 용마루의 최고 높이는 지상에서 7m 이하로 해야 하며, 지하실 설치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건물이 높으면 문화재 환경과의 경관적 마찰도 문제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건물 기초가 지하로 깊이 들어가게 되어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가 파손도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위 아래 역사도시 경주의 건축 고도제한 규제는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 한옥 보존규제에 따라 건축이 진행된 초기에는 ‘갓 쓰고 양복 입은’ 꼴불견의 건물들이 고도 경주의 고적지 주변환경에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 건축규제와는 다른 시각이지만 경주시내와 불국사 사이에 건설된 도로폭이 지나치게 넓고 경주는 온통 싸구려 콘크리트 바닥으로 둔갑하고 말았다‘는 등의 혹푱이 난무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경주~불구사간 도로에는 자동차가 많아졌고, 가로수도 어느새 키가 자랐으며, 갓 쓰고 양복입은 어울리지 않던 한옥건물들도 어느새 제자리를 잡아 어엿한 한옥의 기풍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던 사람들도 그래도 경주만은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경주를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은 독특한 경주문화재에 매료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역사도시 환경으로서 경주분지 주변의 산야와 어울려 전개되고 있는 검은 지붕의 차분한 한옥취락군을 보면서 한국 민족문화의 멋을 이곳 경주에서 비로소 느끼게 된다고 부러워하곤 한다. 이와 같이, 외국 관광객들이 한결같이 경주의 한옥보존 규제 및 경주시 전체의 건축고도 규제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잇다는 데 우리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견축고도 제한은 해당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불만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선대부터 거주하고 있는 한옥의 멋을 알고 잇는 사람이나, 한옥만으로 된 주거환경의 특징을 알고 그곳으로 옮긴 이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현행 한옥 보존규제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이들의 불만에도 타당성은 있다. 개축이나 증축에 있어 한식 기와 지붕의 의무화는 돈이 많이 들고 이런 규제 때문에 땅값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옥규제를 철저히 하려면 이에 걸맞는 정부보조가 있어야 하는데, 1970년대 초부터 보조 구상을 계획하면서도 그 실행이 뒤로 미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6월 16일 경주 도시계획 재검토에 따른 각계 의견청취를 위한 공청회가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 공청회의 주제발표는 나와 당시 문공부 문화재연구소 장경호 소장이 하게 되었다. 나는 경주시 도시계획을 입안한 책임자였으므로 현재의 경주 도시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달라고 하여 ‘경주 도시계획의 이념과 실제’라는 주제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 공청회가 있던 바로 전날 ‘한국일보’는 ‘경주시 개발을 둘러싸고 시민-학계 대립’이란 큰 제목 아래 이 공청회 개최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다음은 당시 보도내용의 일부이다.

정부가 70년 문화유적 보호를 위해 경주시 대부분 지역을 도시계획으로 묶고, 79년 이를 더욱 강화, 도시계획 지역의 83%를 건축제한 지역으로 묶자 경주시민들은 끊임없이 시․도․건설부․문공부에 진정서를 내왔다. 시민들은 3년 전부터 ‘경주시 건축과잉규제 완화축구회’, ‘경주시 고도제한 피해심의회’를 구성, 도시계획 재검토를 끈질기게 추구해 왔다(중략).
김세환(경주시 건축고도제한 피해시민 회장) 등 시민들은 ‘지난번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 후보가 경주도시계획을 조정하여 시민의 불편한 부분을 과감하게 풀겠다고 약속해 놓고 아직껏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번에 시에서 공청회를 연 다음에도 도시계획을 조정하지 않으면 가두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런 시민들의 움직임에 대해 70, 79년 경주도시계획을 입안했던 박병주 교수는 70년 동양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월성․안압지․미추왕릉지구 등 주변을 7m 이하의 단층 한옥지구로 해서 역사도시 환경의 미관을 높였다. 경주 보문단지 개발 등 관광종합개발이 한창 진행된 79년에는 문화유적 도시로서 경주 도시계획을 재정비한 바 있다. 그때 1차로 사적 정비, 2차로 시가지 정비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시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라고 지시, 이를 바탕으로 도시계획을 재정비했다. 이런 과정 속에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그 후 차질이 생겼고 오늘과 같은 진정사태가 나오게 되었다.
“도시계획 입안자로서 세계적 역사도시를 가능한 손상시키지 않으려한 나의 조치에 대해 후회는 없다. 다만 정부가 시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또한 문화재 매장 본포 지역을 정확히 파악, 도시계획을 부분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일은 앞으로 있겠지만 근본적인 경주도시계획 변경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공청회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주최 시민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한국일보’ 보도를 보고 흥분했다고 한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괴변을 토하고 있다느니, 단단히 혼내줘야 하겠다느니 하면서 내가 공청회장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나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갖고 나에게 보내는 공개경고문을 살포하여 봉변을 주도록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경주시장은 나에게 귓속말로 공청회장 안에는 사복형사를 한 30명 배치해 놓았으니, 신변상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청회는 흥분한 시민대표들의 과격한 발언도 있었으나, 그런 대로 큰 불상사 없이 진행되었다.
내가 이 공청회를 회상할 때마다 떠올려지는 것은, 당시 그 공청회 신문보도를 보고 경주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그 공청회 현장에 급거 참석하시어 시종 지켜봐 주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원룡 선생과 황수영, 손보기, 임창순 선생 등 우리 문화재 수호의 신념에 찬 불퇴전의 고귀한 모습이 나의 망막에 크게 비쳐지곤 한다.
나는 80년대 말 언젠가 경주시장과 경주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소원은 가능하다면 나 같은 사람도 경주 명예시민으로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니 지금도 이 소원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 나의 소망과는 달리, 경주시민 대표들에 의해 화형식부터 당하고 말았으니….
경주 이야기가 나오면 실로 감개가 무량해진다.
 


본 내용은 월간 국토해양저널 1999년 1월호(통권 174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비화! 경주 종합개발사업> 시리즈는 창간 14주년을 맞이하여 1998년도부터 장기 연재되었던 주옥같은 글들로 <비화! 경부고속도로 뒷이야기>에 이어 본 홈페이지를 통해 재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기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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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와교통

2021년 6월호
(통권 4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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